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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시마 쥰코X키리기리 쿄코] 

​W. 서녘불꽃

 잔먼지들로 가득한 탁한 공기 너머로 쾌쾌한 냄새가 전해져온다. 긴장감을 한 모금 삼키고는, 한 걸음 두 걸음 불길한 예감을 뒤쫓으며 나아갔다. 구두발 소리가 긴 통로 벽에 부딪쳐 상쇄되었다. 머지 않아 눈 앞에 단단히 잠긴 문이 나타났다. 그림자에 모습을 숨긴 한 사람은 차갑게 식은 안광을 반짝이며 날카롭게 손잡이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발달한 관찰력이 작은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손잡이와 문짝에 소량 묻어있는 기름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남은 흔적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이 문을 지나가다 발라놓았음이 틀림 없으리라. 하지만 왜? - 부풀어오른 의문을 외면하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마음속으로 제껴놓은 물음을 한 구석으로 밀어넣고 일단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그녀는 보라색 장갑을 낀 손으로 천천히 열쇠를 꺼냈다. 평상시보다 좋지 않은 상황에 불길한 예감을 주는 징후, 그리고 비릿한 직감까지. 그 모든 감각들이 그녀를 이 문으로 이끌어주었다. 분명 이 앞에 무언가가 있음이 틀림 없었다. 엄청난 악의를 품은 무언가가. 그녀는 그 악의와 마주치기 전에 침을 한 모금 삼켰다. 평범한 사람 같았다면 긴장감에 못 이겨 손을 떨다가 열쇠를 놓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많은 것들을 배운 그녀는 침착하게 열쇠구멍을 끼워 돌렸다. 잡생각들을 떨쳐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그리고는 '할 일'을 우선으로 떠올린다. 속으로 되뇌이던 그녀는 손잡이를 돌려 천천히 문을 밀어 젖혔다.

 

 문틈에서부터 갈라져나온 새하얀 조명이 정면에서부터 그녀를 비추었다. 곧 그녀가 두른 보라색 자켓과 뒤로 길게 내려선 은발이 드러났다. 조명이 켜져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비장한 표정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초고교급 탐정 키리기리 쿄코, 그녀에겐 이곳을 조사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매서운 조명을 뚫고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똑바로 직시하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초점이 차츰 맞춰지고, 뒤늦게 귀를 때리는 굉음을 인지하였다. 거대한 망치가 바닥을 주기적으로 때리는듯한 굉음. 그녀는 이 방의 쓰임새와 더불어 굉음의 소리를 직감해냈다.

 

 이 곳은 타지 않는 쓰레기를 위한 압축 시설. 틀림 없이 이 굉음은 프레스기다. 하지만 이 시각, 모두가 잠들고 있는 새벽 3시에 프레스기가 가동되고 있다. 쾅- 쾅- 레일 위를 때리는 무거운 소음이 귓가를 울렸다. 누가, 왜 이 시간에 가동한 것인가. 그러나 그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멈춰 있던 레일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레일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가 살피던 키리기리는 그 위에 즐비하게 깔린 물건들을 가볍게 훑었다. 잡다한 재질의 의자들과 상자들이 늘어져 있었다. 곧 프레스기에 찌그러져 운명을 맞이할 도구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물건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제법 묵직한 것이 담겨진 보따리 한 묶음. 처음에는 프레스기로부터 전해져오는 울림 때문인지, 보따리 속 내용물이 조금씩 떨리는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쿵- 굉음이 울릴 때마다 보따리가 꿈틀거림이 심해졌다. 레일 위에 놓인 그것이 프레스기로 점점 가까워질 때마다 그 움직임은 점점 뚜렷해졌다. 자신의 위험을 감지한듯, 더욱더 거세게 몸부림쳤다.

 

 보따리에 누군가가 들어가 있다. 그 사실이 그녀를 즉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키리기리는 제일 먼저 기계제어실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제어실의 문은 안쪽에서 무언가가 걸린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으로 달려들어 부딪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두어 번 두들겨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 수 없다면 제어실로 들어가 기계를 끌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레일 위로 시선을 돌렸다. 보따리는 멈추지 않고 레일을 따라 움직였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간 보따리는 프레스기에 짓눌릴 게 물 보듯 뻔했다.

 

 기계를 멈출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대로 구경만 하다간 저 보따리에 갇힌 사람이 위험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위험에 뛰어드는 선택지 뿐이다. 키리기리는 레일 위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잡다한 폐품들을 넘어들며 보따리를 향해 질주했다. 그녀가 드는 생각은 단 한 가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지만 겨우 희망을 유지하는 이 시기에서, 단 한 사람도 잃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 뿐이었다.

 

 정신 없이 달렸던 덕분일까. 보따리와 프레스기 사이의 거리가 고작 몇 미터 남지 않는 타이밍에 도착할 수 있었다. 키리기리는 보따리를 레일 밖으로 밀어뜨려보았다. 그러나 보따리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무게가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던 것이다. 한 사람 외에도 무게를 지탱하는 다른 물건들이 들어있던 걸까. 이렇게 된 이상, 보따리를 먼저 풀고 사람을 먼저 꺼내는 수 밖에 없었다. 키리기리는 보따리의 매듭으로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순간 키리기리는 손을 멈추었다. 그 대신에 자신이 낀 장갑에 눈을 돌렸다. 이미 장갑에는 문손잡이에서 묻은 미끌미끌한 기름이 묻어 있었다. 소량이라고는 해도, 기름 묻은 장갑으로 꽉 묶인 매듭을 풀기는 힘들다. 설마, 이것 때문에 문에 기름을 발라두었던 건가? 키리기리는 머리가 찌릿 아파왔다.

 

 쾅, 주춤하던 사이에 프레스기가 한 번 울렸다. 키리기리는 지금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하나 떠올렸지만 망설임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이 보따리 매듭을 풀어 사람을 구해낼 단 한 가지 방법. 바로 장갑을 벗는 것 뿐이다. 맨손이라면 매듭을 풀 수 있을 터. 하지만 키리기리가 이 장갑을 선뜻 벗기에는, 이 맨손에 지닌 과거의 무게가 상당했다. 그녀 눈 앞에 그 동안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불, 연기, 그리고...... 자신에게로 손을 뻗었던 안경 낀 한 사람.

 

 쾅. 프레스기는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한층 커진 굉음이 키리기리의 정신을 들게 했다. 이젠 코앞이다. 제 나름대로 세웠던 룰, 가족이 될 사람 외에는 맨손을 보여주지 않는다-라는 다짐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선 과거는 아무 의미 없을 뿐인가. 키리기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쾅. 또 다시 프레스기가 울렸다. 이제 두 어 번만 더 울리면 깔려버릴 거리다. 키리기리는 결국 장갑을 던지고 맨손을 드러냈다. 새까맣게 타서 피부조직이 전부 상해버린 손이 공기와 닿았다.

 

 "윽......"

 

 키리기리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시간이 없었다. 곧장 매듭을 빠르게 풀고 줄을 잡아당겼다. 쾅, 머리에 피가 쏠리며 호흡이 빨라진다. 손에는 쥐가 날 것만 같았다. 시야가 까맣게 변할 것만 같던 순간, 보따리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키리기리는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보따리 안에서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곰돌이 인형 세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기계적으로 몸을 꿈틀대더니, 보따리가 풀어지자마자 키리기리가 있는 방향으로 스르르 고개를 돌렸다. 평범하게 생긴 검은색 눈과, 붉게 점등하는 키보가미네 마크 모양을 한 반대쪽 눈 세 쌍이 키리기리를 꿰뚫었다. 그것들을 본 키리기리는 무릎부터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소름에 머리가 순식간에 백지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조명이 나가버렸다. 프레스기는 쇳소리를 내며 멈추었고, 레일이 급정거하여 키리기리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순식간에 어둠이 짙게 깔리자, 키리기리는 레일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럴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붉은 눈 세 개가 키리기를 향해 쇄도했다. 키리기리는 재빨리 구두로 레일바닥을 밀며 몸을 뒤쪽으로 뺐다. 인형들은 발톱을 내세우며 키리기리를 향해 할퀴기어 들었으나, 동작이 완벽하지 않은듯 모두 빈땅에 헤딩하며 레일 위를 뒹굴었다. 가까스로 피한 키리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직후에 날아오는 그물을 미처 피해내진 못했다.

 

 모노색 곰인형에서 투사된 그물은 키리기리의 몸을 감싸버렸다. 키리기리는 그 즉시 몸을 움직여 그물로부터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미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미 그물과 엉켜버릴 대로 엉켜버린 것이다. 입술을 바싹 깨물은 키리기리는 줄을 하나씩 쥐며 해집기 시작했다. 어쩐 일이선지 프레스기는 멈추었지만, 다시 언제 작동할지 모른다.

 

 바쁘게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멈칫한 것은, 보따리에서 곰인형 외에 한 사람의 실루엣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였다.

 

 조명이 꺼져 그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숨통을 쥐어누르는 위협감이 키리기리의 심장을 자극했다. '도망쳐야한다.' 공포와 불안감에 잠긴 키리기리의 속마음이 쉴새 없이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키리기리에게는 위험과 마주해야하는 숙명이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초고교급 탐정이자, 키보가미네 학원장의 딸이니까.

 

 "......정체를 밝혀."

 실루엣은 한 걸음 두 걸음 키리기리에게로 접근했다. 서서히 어둠이 익숙해지며, 키리기리의 특유의 관찰안이 빛을 발휘한다. 지금 마주보고 있는 상대의 신장은 169cm, 철저히 관리된 몸매에 옆으로 길게 묶은 양갈래 머리... 키리기리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만이 떠올랐다.

 

 실루엣은 조금 더 다가갔다. 곰인형의 붉은 눈에서 희미하게 발산되는 조명 덕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키리기리가 식별하기에 충분한 밝기였다.

 

 "......에노시마 쥰코."

 

 키리기리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정체를 들킨 상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보자마자 제거하려 들지는 않을까. 마음속으로 대비하기 위해 계획을 떠올려본다. 그러나 이 그물 때문에 키리기리의 행동에는 제약이 컸다.

 

 상대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상대의 모습은, 키리기리가 생각했던 굳건한 흑막스러운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아아... 절망적... 절망적걸망적절망적... 휴대용 조종기가 말을 안 듣네... 절망적이야... 이래서야 이런 절망적인 쓰레기는 절망적으로 사용할 수 없잖아... 정말... 절망적...."

 

 에노시마는 머리에 버섯이 달린 채 풀이 죽은 눈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기계를 바라보았다. 하는 말로 미루어보아, 무선 리모컨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이윽고 에노시마는 곧장 리모컨의 붉은 버튼을 누르며 프레스기 너머의 쓰레기 투입구를 향해 냅다 던져버렸다.

 

 "꺄하하, 죽어라 이 절망적인 조종기! 절망적인 불꽃놀이가 되어라!"
 

 "무슨-"

 

 고작 몇 초만에 텐션이 높아진 에노시마를 보며 영문을 잃은 키리기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기도 전, 사방을 하얗게 채워넣는 섬광이 귀를 찌르는 폭음과 함께 터져나왔다. 바로 곰인형에서 터져나온 폭발이었다.

 

 "으읏!"

 

 키리기리는 진작에 넘어진 덕에 자세가 낮춰진 터라, 파편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검은색 재가 된 잔부스러기들이 그녀의 머리칼과 뺨, 그리고 옷 곳곳에 묻어났다. 쾌쾌한 냄새가 목을 찔러들었고, 키리기리는 기침을 뱉으며 찔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 앞에는 에노시마 쥰코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탐정나리... 절망적으로 늦었네? 안 그래?"
 

 "... 에노시마 쥰코.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네. 전부, 당신의 짓이었어?"

 

 키리기리가 경계하며 에노시마를 노려보았다. 준비된 세트장, 가동된 프레스기, 이상한 인형들과 그물...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상황은 에노시마가 판 함정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우웅! 키리기리 쨩은 절망의 근원을 찾으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
 -그렇지만 당신은 절망적이게도, 큰 성과를 보지 못했죠. 절망적으로 정말 유감입니다.
 -허나 시간이 흘러 오늘. 그대는 친애하는 나님, 에노시마 쥰코님을 알현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니. 이 몸의 나름대로 상을 부여하겠노라!"

 주기적으로 에노시마의 말투는 변해갔다. 흡사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는 마냥,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마냥. 갈수록 알 수 없는 그녀를 상대하는 동안, 키리기리의 혼란스러움은 더해져갔다.

 

 "그 상이라는 게, 바로 이런 함정...? 하지만 너무 노골적이잖아. 당신이 정말 인류사상최대최악의 절망적 사건의 주모자라면... 왜 내 앞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거지?"

 

 초고교급 패션걸 에노시마, 그녀가 정말 절망의 주모자라면. 여지까지 그랬던 것처럼 정체를 숨기고 있으면 된다. 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될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흐음? 고작 그게 절망적으로 궁금한 건가...?"
 

 "이 프레스기... 내가 한 발만 늦었어도 당신은 죽은 목숨이었어. 나 하나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스스로의 목숨을 미끼로 던지다니. 이건 너무... 주모자 치고 대담한 거 아냐?"

 

 키리기리는 에노시마의 행동을 떠올렸다. 에노시마는 여지껏 보따리에 숨어서 키리기리가 가까이 접근하기까지를 기다렸다. 동시에 그녀는 간발의 차로 프레스기에 압사당하기 직전까지 내몰렸었다. 어떻게 이런 스스로에게 위험한 짓마저 서슴치 않고 행할 수 있는 것인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러자 에노시마는 괴상한 웃음으로 반응했다.

 

 "우푸...우푸푸푸푸... 함정을 파다가, 되려 죽어버린다! 물론 그럴 수 있어. 그렇지만! 그건 그거대로 절망적인 결과라고. 정말 최고야!"
 

 "......무슨......"
 

 "물론 제 초분석력에 의하면, 당신이 가까스로 저를 구할 확률은 98.7프로. 절망적으로 높은 확률입니다. 이 정도는 절망적인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안경을 고쳐쓰던 에노시마가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키리기리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더욱 깊숙히 들이밀었다. 거의 숨결이 닿을만한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 왜 나지?"
 

 "으응?"
 

 "왜 하필 나를 노린 거지?"

 

 키리기리가 경계의 끈을 놓지 않으며 고개를 뒤로 뺐다. 에노시마가 부담스럽게 밀어붙이는 얼굴로부터 조금이나마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에노시마는 키리기리를 추격하지 않았다. 그 대신, 몸을 빳빳이 세우며 반들반들한 눈빛으로 그물 걸린 채 도망조차 치지 못하는 가여운 상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완성."
 

 "......뭐라고?"
 

 "두 번 말하지 않을 거니까, 잘 들어. 나를 완성하려면. 당신이 필요해, 키리기리 씨. 당신이 필요해, 키리기리 씨.
 ......꺄아, 어뜩해! 말해버렸다! 절망적으로 설렌다구!"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키리기리가 눈썹을 찡그린다. 완성, 에노시마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해 초고교급 탐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인가? 혹은, 학원장의 딸로서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의미인가? 키리기리는 입술을 꽉 캐물며 에노시마를 노려보았다. ...엉킨 줄은 이미 풀었다. 휘감겨진 팔다리를 풀러내자고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물은 꽤 컸기에, 허리를 살짝 굽힌 채 그물망을 조금 쳐올리면 몸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할 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계획에 순순히 당해주진 않을 거야."
 

 "으음. 그렇군요, 탐정 씨. 절망적으로 강인한 정신력이로군요. 그렇다면 일단 풀어드리죠."
 

 "......뭐?"

 

 그 순간 천장에서 반짝이던 은빛 물체가 바닥에 우수수 꽂혔다. 키리기리는 뒤늦게 그 물체를 파악했다.

 

 바로 컴뱃나이프들이었다. 그것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물줄의 매듭부위들을 끊어냈다. 그것도 키리기리가 서 있을 장소를 일부러 빗나게 하려는듯, 정확한 겨냥이었다. 컴뱃나이프들의 출처였던 위를 올려다보자, 천장에 배치된 투사장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부 궤도를 예상하고 작동한 것인가.

 

 그러자 한 가지 불길함이 키리기리의 두뇌를 스쳤다. 애당초 키리기리 자신의 목숨이 목적이었다면. 그녀의 머리에 칼 한 자루만 조준했다면 충분했으리라. 이는, 에노시마가 마음만 먹었다면 키리기리를 언제든 죽일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헛점을 보이다니. 한 수 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기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키리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으며, 그녀의 머리는 계속 눈 앞의 상대를 제압하는 데에 생각을 집중했다. 

 

 "우뿌뿌뿌... 그물이 풀리면 바로 달려들듯이 굴더니. 왜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쳐다보는데? 혹시 멍탐정......?"
 

 "도발은 그만 둬. 함정만으로도 이 정도 철저함을 보이는 당신이, 반격 수단을 빠뜨렸을 리가 없잖아?"
 

 "아...... 절망적이네...... 머리가 절망적으로 좋으면 정말 절망적으로 재미가 없어져......"

 

 머리에 버섯을 피우던 에노시마는 곧장 품 속의 금속물체를 프레스기 너머로 던졌다. 그 행동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기에, 키리기리는 그 물체가 무엇인지 예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아니, 사실, 그녀의 순발력 높은 관찰안으로 '식별'을 했다. 그러나 그 '식별'한 물건의 정체를 의심하느라, 그 뒤에 벌어질 현상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금속물체가 프레스기 너머 쓰레기 투입구로 들어가기 몇 초가 지났을까. 어두운 환경을 주홍빛으로 칠하던 섬광 뒤로 쩌렁쩌렁한 굉음이 터져나왔다. 그 폭음은 레일 위까지 진동으로 남아 키리기리의 두 다리를 후들거리기에 충분했다. 키리기리는 넘어질 뻔한 자세를 바로잡고,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투입구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오는 탄내가 기계금속의 정체를 뒷받침해주었다.

 

 틀림 없이 폭탄이었다. 에노시마는 자신이 챙겨놓은 소형 폭탄을 투입구 쪽으로 버린 것이다.

 

 "이제 괜찮아. 아, 이 학교의 쓰레기처리 시설은 내구력이 절망적으로 좋아서, 곰돌이 우주선을 발사한다고 해도 멀쩡할걸? 그러니 걱정하지 마!"
 

 "아니...... 그보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서슴 없이 폭탄을 버린 거지?"
 

 "그건 바로 이 몸이 자비를 배풀어주었기 때문이노라! 어서 무릎을 꿇어 나를 찬양-"

 

 레일 위에 떨어져 있던 왕관 하나를 급히 주운 에노시마가 주절거리던 순간. 기회를 노리던 키리기리가 에노시마에게로 달려들었다. 상대는 폭탄을 잃었을 뿐 아니라, 매번 태도를 바꾸느라 불필요한 행동을 소모한다. 그리고 일대일 대면에서의 불필요한 행동은 곧 빈틈을 의미했다. 먼저 양팔을 제압하기 위해, 키리기리가 두 손을 내질렀다.

 

 그러나 에노시마는 오히려 키리기리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우습게도 키리기리의 손 궤적을 간단히 피하고는, 가까이 접근해 와락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에노시마의 행동에 키리기리는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에노시마는 팔에 힘을 꽈악 넣으며 키리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 상태로 키리기리의 어깨 위에 뺨을 파묻히고는 키리기리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자비는 거짓말이었어. 난 질리는 게 절망적으로 싫거든. 계속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으면서 블라블라블라, 어쩌구저쩌구, 궁시렁궁시렁 - 어후, 절망적으로 신물이 난다고? 차라리 이렇게 키리기리 쨩과 가까이 붙으며 절망적으로 꼼짝 못하게 힘으로 누르는 게 더 좋거든! 키리기리 쨩은 어때? 절망적으로 죽을만큼 좋지?"

 

 팔까지 감싸진 키리기리는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내 떨림을 멈추고는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냉정을 되찾은 키리기리가 입을 열었다.

 

 "...난 죽지 않아."
 

 "우뿌? 우뿌뿌뿌? 키리기리 쨩, 뭐라쿠마?"
 

 "난... 죽지 않아...!"

 

 키리기리는 이마로 에노시마의 머리를 전력으로 쿵 찧었다. 그 반동으로 에노시마가 살짝 발을 비틀거리는 틈을 타, 키리기리는 상체를 아래로 숙였다. 그러자 자연스레 팔구속을 풀어낼 수 있었다. 몸이 자유로워진 키리기리는 즉시 에노시마의 팔을 붙잡고 뒤집어, 힘껏 비틀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레일 위로 깔아엎었다. 그녀가 다시 일어서기 전에, 키리기리는 자신의 몸무게로 에노시마를 짓눌렀다.

 

 "아악! 아하..하하하하! 이거, 절망적으로 아픈데, 탐정 나으리? 역시 범인을 쫓는 탐정은 호신술 정도는 기본이랬던가?"
 

 "바른대로 말 해. 이 쉘터에 존재하는 주모자는 당신 뿐이야? 공범은?"
 

 "공범? 글쎄......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 아아앗! 아하하... 정말 절망적으로 힘을 주잖아?"

 

 키리기리는 더욱 강하게 팔을 비틀었다. 가능한 상대의 진술을 얻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담은 이 장소가 위험하다. 절망이 학원 내까지 퍼져 모두의 미래가 박살날 수 있다.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자니, 에노시마를 구속한 팔의 힘이 더더욱 강력하게 들어갔다. 남아있는 희망들의, 그리고 인류의 주적이 눈 앞에 넘어져 있다. 이대로 절대 놓칠 수는 없었다.

 

 "에노시마 쥰코. 당신을 체포하겠어. 당신은-"
 

 "그래서?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모든 진술은 법정에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을 경우- 아아, 절망적으로 지루한 미란다 법칙..."
 

 "입다물어."

 

 키리기리는 에노시마의 등을 찧고 있는 무릎에 힘을 넣었다. 그럼에도 에노시마는 무어가 그리 좋은듯 아하하 웃으며 어깨를 꿈틀댔다. 그러다 문득 텐션이 낮아진 어투로 말을 내뱉었다.

 

 "아...... 절망적...... 모든 게 물 보듯 뻔한걸......"
 

 "......뭐?"

 

 키리기리가 물음을 던지는 음성과 동시에 굉음이 울렸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눈 앞의 프레스기가 다시 작동한 것이다. 쾅- 쾅-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퍼지는 강철의 충돌음이 심장박동을 빠르게 재촉했다. 머지 않아 바닥이 흔들리더니, 레일의 바퀴 쪽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레일이 움직이려는 징후를 보인 것이다.

 

 곰인형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 치고, 에노시마와 몸싸움을 벌이면서 프레스기로부터 조금 멀어졌긴 했지만. 여전히 십 수 초만 지나면 프레스기에 깔려버릴 거리였다. 키리기리는 직감적으로 자리부터 피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바로 아래에 깔린 에노시마가 신경쓰였다. 이대로 자리를 피한다면, 에노시마는 그 틈을 타 키리기리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것이 분명했기에.

 

 "키리기리 씨. 분명 그렇게 말했지? 죽지 않는다고. 전장에서 태어난 사람마냥, 아아-주 비장하게 말했잖아?"
 

 "......"

 

 이제 그만 놓아주라는 의미인가. 키리기리는 에노시마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하늘빛 눈이 프레스 기 위에서 내리쐐는 모니터 조명에 비쳐 반짝인다. 겉보기에는 초고교급 패션걸의 아름다운 보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키리기리는 그 보석 내면에 숨겨진 것을 발견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 이면에 스며드는 그림자. 절망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는 보석의 깊숙히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어쩔 거야? 우리 탐정님께서 말하신대로, 살아남을 거야? 아니면-"
 

 그 다음 에노시마의 입이 움직이는 순간, 키리기리가 거친 손놀림으로 화답했다.

 

 "아앗, 뭐야...? 이대로 절망해버려서 맛이 가는 건가 싶었는데. 눈빛이 바뀌었네?"
 

 "당신은... 나와 함께 갈 거야."

 

 키리기리가 비장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한 번 결심한 이상 절대로 바꾸지 않겠다는듯. 스스로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에노시마를 놓아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절망적이네. 나 외에 공범이 더 있을지도 모르잖아?"
 

 "당신이 절망의 주도자라면. 공범은 역시 당신의 자매, 이쿠사바 무쿠로겠지. 내가 죽더라도, 아버지께서 반드시 알아채실 거야."
 

 "와아. 정말 절망적. 그래도 말야. 사랑스럽지만, 절망적으로 냄새나는 우리 언니는 초고교급 군인이라고. 네 생각만큼 순순히 당해줄까?"
 

 "우리쪽엔 오오가미 씨가 있어. 초고교급 격투가라면 승산이 있을지 모르지."

 

 죽음의 소리를 표효하는 프레스기를 앞두고, 두 사람의 다급함을 담은 신경전이 오간다. 앞으로 두 세 번의 표효가 남았다. 두 사람을 기다리는 침묵의 그림자가 양쪽의 아드렌날린을 가득 분비시켰다. 키리기리는 얼굴이 갈수록 새파래졌지만, 결심을 놓지 않으며 표정을 굳혔다. 반면, 에노시마는 죽음을 앞둔 이 상황조차 즐거운 모양새였다. 활짝 찢어진 입꼬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네 아버지는? 초고교급 절망과 함께 살점과 뼈가 뒤엉킨 네 모습을 보고 어떤 절망적인 생각을 할까? 절망적으로 궁금한걸!"
 

 "......"

 

 속사포로 내뱉는 에노시마의 말에 키리기리는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로잡으며 상대의 말을 무시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아서일까. 단 한 번, 프레스기의 표효를 앞두고서야 에노시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질려버린 것이다.

 

 "아아... 라이헨바흐의 폭포도 별 거 없구나... 절망적. 그나저나 키리기리 씨. 그 화상은 어디서 생겼어?"

 

 에노시마에게로 향하던 키리기리의 시선이, 자신의 손등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사고가 뿌옇게 흐려버렸다. 절망을 뿌리뽑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겠다는 각오도, 마음 한 켠에 자신의 죽음을 슬퍼할 진에게 남길 미안함도. 전부 뿌옇게 흐려버렸다.

 

 손등에 맺혀있던 화상. 그리고 그 화상은 키리기리에게 아득한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범인을 잡으려던 지금. 분명 과거에 이 상황을 비슷하게 겪은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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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을 붙일 거야."

 치마에 도수 높은 술을 들이부은 채로 그녀가 말했었다. 그러자 그녀 앞에 서있던 안경 낀 탐정이 그녀를 말렸었다. 안경 낀 탐정은 진심으로 걱정과 경악을 담아 외쳤다.

 

 "그만 둬!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야!"

 

 한편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작은 탐정, 키리기리 기억 속의 자신은 라이터를 금방이라도 떨구려는듯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범인을 고발할 땐 목숨을 건다. 할아버지께 그렇게 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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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이......언니......"

 일시적으로 질린 표정이었던 에노시마의 얼굴이 다시 활짝 피었다.

 "빙고."

키리기리가 잠시 혼이 나간 사이. 힘이 약해진 틈을 탄 에노시마가 키리기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키리기리가 저항해보았으나,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에노시마는 키리기리를 끌어안은 채 레일 위에서 쓰레기 투입구로 향해 굴렀다.

"으읏...!"
"모처럼 운명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절망적이네!"
"도대체 무슨......"

에노시마와 뒤엉킨 키리기리는 순식간에 프레스기의 수직 아래의 지점까지 굴렀다. 살벌하게 떠 있는 프레스기의 쇠추가 그림자를 내비추어 두 사람의 전신을 가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두 사람을 향해 내리찍었다.

그러나 에노시마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키리기리를 껴안은 채 조금 더 굴러, 간신히 프레스기의 쇠추를 피해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투입구 속으로 떨어졌다. 단순간에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며. 멀어져가는 키리기리의 정신 속에 함께 추락하는 에노시마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절망에 절망할 뻔한 나를 놓아줘 다시 한 번 절망해버리게 만들어주다니. 키리기리 씨, 절망적으로 인상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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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쾌쾌한 쓰레기 냄새가 키리기리의 코를 자극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 장소가 어디인지, 어쩌다가 이곳에 떨어졌는지 전부 기억해냈다. 바닥에 깔린 쓰레기더미들이 만져진다. 아마 이것들이 쿠션역할을 해주었으리라. 그럼에도 어째선지 몸이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분명 여기저기 아프고 쑤셔야 정상일 텐데. 운이 좋은 걸까, 라며 생각하던 키리기리는 삽시간에 위화감을 느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아아.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 절망적으로 질리네. 일어났어, 탐정 나으리?"

 

 목소리와 말투만 듣고도 에노시마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도저히 들어올릴 수 없는 것이다. 키리기리는 벽에 기대어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서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컨디션이었다.

 

 ......에노시마가 수작을 부렸음이 틀림 없으리라.

 

 "...독? 가스? 아니면 약?"

 

 서론을 생략하고, 힘겹게 숨을 들이마신 키리기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꺼냈다.

 

 "예전에 초고교급 신경학자가 생전에 만들어두었던 약이야. 기념으로 아끼고 아끼던 건데...... 하, 어때? 절망적으로 약빨이 죽이지?"

 

 키리기리는 손가락 한 번 까닥할 수 없었다. 겨우 말대답만 몇 마디씩 할 뿐. 그조차도 힘들어서 헉헉대며 호흡을 유지해야만 했다.

 

 "......나를...... 어쩔 셈이지."
 

 "으음......"

 

 에노시마는 손가락으로 키리기리의 턱을 치켰다. 그리고는 그녀의 고개를 살짝 들여올렸다. 애시당초 힘이 빠진 키리기리는 맥 없이 에노시마의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얼굴을 들이미는 에노시마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흑막을 눈 앞에 두고 손을 놓고만 있어야하는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에노시마를 놓았으면 안 됐는데. 그대로 꽉 붙들어서, 운명을 같이했어야 했는데.

 

 극적으로 살아남은 키리기리의 마음에 남은 것은 안도감이 아닌, 실패 뒤의 허망감이었다. 이제는 누구도 이 초고교급 절망을 막을 수는 없다. 정말 강력한 희망이라도 등장하지 않는 한은, 키보가미는 이미 에노시마 앞에 굴복한 것이리라. - 라는 생각과 동시에, 키리기리의 마음속에 그림자가 스며들어갔다.

 

 "아아. 절망적으로 질리네."
 

 "무슨...... 의미로 말하는 거지......?"

 

 호흡을 힘겹게 삼키던 키리기리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에노시마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누구지. 유이라고 하는 사람은?"
 

 "으읏......!"

 

 키리기리는 에노시마의 손을 뿌리치려고 고개에 힘을 넣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 상태로는 턱도 없었다.

 

 "예전에 같이 했던 동료였나봐? 아픈 추억이라도 있었어? 이 화상이랑 분명 관계 있겠지? ......네 생존 본능을 건드렸던 걸 보면. 어쩌면, 아버지 이상으로 소중한 존재였나봐?"

 

 에노시마가 다른 손으로 키리기리의 화상 입은 손을 잡아올렸다. 검게 타버린 손등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으리라 맹세한 상처였다. 가족이 될 사람이 아닌 이상은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될 흔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흑막의 눈도장으로 남아버리다니. 키리기리는 필사적으로 그 사람을 떠올렸다. 절대 잊고 싶지 않은 한 사람. 그 사람이 남겨주었던 따스함을 떠올려본다.

 

 그러나 어떻게든 떠올려보는 따스함 사이로. 에노시마의 그림자가 가로막았다. 태양을 가리는 구름 낀 하늘처럼, 키리기리의 마음 속의 어두움은 점점 짙어져갔다.

 

 "......그럴 필요 없어."

 

 에노시마는 키리기리의 얼굴을 감싸안았다. 꼬옥 따스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동시에 알 수 없는 압박감이 키리기리의 숨통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절망이라는 냄새가 뚜렷이 육감을 자극했다. 그 절망의 냄새는 키리기리의 과거 속 그 사람을 잊어버릴만큼이나 강렬했다. 이대로 에노시마에게서 절망을 느낀다면, 과거의 그 사람을 영원히 기억 속에서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키리기리의 마음은 과거의 온기를 떠올리기 위해 발버둥쳤다. 필사적으로 태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태양은 손에 닿기엔 너무나도 멀었다. 현재와 과거의 간격만큼이나 '절망적으로' 멀었다.

 

 태양은 그렇게 검은 그림자들 사이로 사그라들었다.

 

 "안...... 안 돼......"
 

 "돼. 잊어버려. 단순한 최면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네 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어때, 아름답지 않아?"
 

 "안 돼, 안 돼, 안 돼-"

 

 약 때문일까, 아니면 에노시마의 정체가 초고교급 절망이었기 때문일까. 에노시마가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유이의 모습이 한 페이지씩 찢겨나갔다. 에노시마가 포근히 안아줄 때마다 유이의 목소리가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머지 않아. 키리기리는 과거의 그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착하지, 키리기리 쨩?"

 

 에노시마는 성격을 바꾸며 귀여운 척을 보였다. 그런 그녀가 가증스럽게 보였다. 얼굴에 흠집을 내고 싶었다. 잊어버린 기억에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키리기리는 무력했다. 소중한 기억을 잃고도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었다.

 

 결국, 에노시마에게로 향하던 마음 속 증오의 화살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죄책감, 자학심, 자괴감, 자기혐오... 수 많은 감정들이 빗발쳤다. 이미 키리기리의 마음 속, 안경 낀 탐정으로부터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선물받았던 기억은 숯처럼 검게 칠해지고 바스라진 뒤였다.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것 뿐이었다.

 "웅, 웅. 키리기리 쨩! 힘 내. 절망이란 건 말이지, 누구나 한 번씩을 겪는 일이야. 절망 뒤에 사람이 더 강해진다곤 하지만...
 글쎄. 어떨까나? 절망에 너무 취해버린 나머지, 절망을 갈망해하기도 하는걸! 꺄하하핫!"

 

 추억을 잃어버린 키리기리의 눈은 생기를 잃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오직 기계적으로 절망감을 맛보며 절망을 위해 움직이는, 절망의 탐정이 하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에노시마는 키리기리에게 속삭였다.

 

 "어때, 키리기리 씨? 정말... 절망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아?"

 

 키리기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텅 빈 눈이 그녀를 반겨줄 뿐이었다. 흡족한 듯, 에노시마가 키리기리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이 몸에게 절망의 절망을 선사해줄 뻔한 절망으로 기억해주겠노라!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도다. 본래 학원장은 영리하며 경계심이 많으니... 이 몸조차 건드릴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도다. 하지만 딸이 상대라면 이야기가 다를 지어니... 마지막이다. 남아있는 추억을 희생하여 더욱 깊은 절망의 웅덩이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면-"
 

 에노시마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명령을 내렸다.
 

 "-네 아비를 내게 바치거라!"

 

 키리기리는 일어섰다. 그녀는 여전히 약에 취해 힘을 잃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몸은 일으켜졌다.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그 힘. 그것은 육체적인 힘이나 희망의 발악따위가 아니었다. 이 시간부로 초고교급 탐정이자 절망인 키리기리를 움직여주는 동력원은, 절망 그 자체였다.

 키리기리는 한 쪽 무릎을 굽혔다. 고결하고 우아한 자태를 보이며, 그녀는 모든 절망들의 주인인 에노시마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그녀는 희망을 쫓는 탐정이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절망에 충실한 종이었다.

 "우뿌... 우뿌뿌뿌..."

 

 에노시마의 웃음소리가 키보가미네 학원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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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 업!
 

 -...타임 업이라니. 이상해! 지금까지 그런 건 한 번도...
 

 -...나의 패배야. 함정이라고 해도. 이 함정을 피하지 못한 내 패배...
 

 -...그, 그럼... 혹시 키리기리 씨는 정말로...
 

 -...자, 힘차게 갑시다! 벌칙 타임!


 

 키리기리는 눈을 감았다. 쾅- 쾅- 학원 전체를 울리는 프레스기의 울림이 심장의 고동소리가 되었다. 팔다리가 떨리며,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다. 이대로 끝이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지도 못한 채. 단서를 거의 찾을 뻔한 순간에. 그녀는 나락으로 미끌어지고야 말았다. 진실은 야박하게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쾅- 다시 한 번 프레스기가 울렸다. 이제는 꽤 가까워졌다. 마지막 호흡을 들이킬 차례다. 분명 공기청정기가 있다곤 했지만, 학원 내부의 꽉 막힌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리라. 그녀는 사건의 실마리와 함께, 미련을 내려놓는 순간.

 

 작은 섬광의 그녀의 두뇌를 스쳐지나갔다.

 흑막의 정체, 자신의 재능, 학원장, 그리고 세계의 절망화까지. 그녀는 전부 떠올리고야 말았다. 무엇 때문일까. 프레스기에서 뿜어져나오는 고동소리와 전율감이 기억을 깨우기라도 한 것일까.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진실에 한 발 더 다가선 탐정이었다. 누구보다 앞서나가서, 모두에게 진실을 알려야하는 탐정. 그렇게 탐정의 입은-

 -단 한 번의 프레스기의 표효소리와 함께 침묵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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