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리기리 진X코마에다 나기토]
Reborn
W. 고요
“고등학교 정기 건강검진 때였어요. 처음 그걸 알게 된 건요.”
서두만으로도 이야기가 어떠한 사건에 접어들기 시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소년의 약력 속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것이다. 아마도 이야기는 끝으로 다가가고 있다.
“징조는 없었어요. 종종 피곤하긴 했지만 원래 체력이 없고 공부 량도 늘어 가니까 그러려니 했거든요. 건강검진에서 대학병원 정밀검사 소견이 나왔고, 대학병원에서는 질릴 정도로 사진을 찍고 피를 뽑아대더니 제 뇌가 어떻게 쪼그라들고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무엇이 부풀고 있는지를 알려 주었죠.”
여태까지와 다름없이, 국어책을 읽듯 단조롭게 중얼거리던 소년의 눈이 슬쩍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모른 척, 큰일이었구나, 놀랐겠지, 같은 무익한 소리도 붙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자, 그 눈동자가 도륵 굴러 다시 아래를 향했다.
“병명고지서는 신기하리만치 얇았고, 그에 적힌 내용도 우습도록 짧았어요. 그래도 조금은 가슴이 뛰었어요. 그야, 이번에는 정말 목숨이 내걸릴 수 있으니까요. 이 정도라면, 대가는 무엇일까― 막연히 꿈꿔 보았던 것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죠. 그래도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 봉투에 접혀 넣어진 병명고지서를 들고, 우선 한동안 학교는 안 가도 되려나, 같은 생각이나 하며 집에 도착한 때, 설마 제 편지함에서 이걸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아이는 낯익은 봉투를 들어 보였다. 이 방에 들어온 때부터 한시도 놓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던 그것에는 길고 신경질적인 손가락의 모양대로 뚜렷이 구김이 가 있었다. 키보가미네의 문장이 새겨져 있고 학원장의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는 사각 봉투. 그 안에 든 서류와 겉봉에 차례로 아이의 이름을 적고 직인을 찍은 것은 물론 그 자신이었다.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도 당연히 잘 알고 있다.
“그 편지에 무슨 문제라도, 코마에다 나기토 군?”
“……무슨 문제냐고요, 학원장님?”
한가로운 물음에, 마치 속삭이는 듯한 어조로 되물어 답한 아이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봉투를 이쪽으로 내밀었다.
받으려 내민 그의 손끝에 봉투가 닿은 순간, 희게 질린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제가 내밀어 놓고는 마치 앗아가려는 손길에 저항하는 듯이, 찰나의 걸림 끝에 그 창백한 손이 떨어졌다. 허공에서 떨어진 손이 이내 제 무릎 위에서 주먹 쥐이는 것을 곁눈으로 봉투를 열었다.
“어디 볼까. 코마에다 나기토 님에게. 귀하가 금번 사립 키보가미네 학원의 77기 ‘초고교급 행운’으로…….”
“…….”
그 단어를 발음할 때 종이 너머에서 작게 불편해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모른 척, 상투적인 공문의 남은 내용을 일부러 소리를 내어 계속 읽었다.
“…… 선발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별지로 첨부한 시일과 장소를 확인하시어 입학식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인류의 희망의 선봉인 사립 키보가미네 학원의 일원이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사립 키보가미네 학원장 키리기리 진, 직인.”
한 번 읽어 내린 내용을 다시 한 번 눈으로 찬찬히 훑은 뒤, 그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형식도 내용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학원장님. 제 고백을 제대로 들으신 게 맞나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소년이 줄곧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아이답지 않게 표표한 인상의, 일견 초연해 보이지만 포기와 같은 참담함마저 감돌고 있던 회색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광란하며 모든 것을 부수어내는 회오리처럼도 보였고, 소리도 빛도 없이 모든 걸 빨아들이는 무저갱의 심연과도 닮아 있었다. 도저히 십대의 아이가 가질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오싹한 그 눈빛을 키리기리는 흥미로이 직시하였다.
“제가 어떤 각오로 여기에 와서, 어떤 심정으로 당신에게 이걸 털어놓았는데.”
이를 갈아붙이듯 그가 내뱉었다.
“제게, 그야말로 썩어빠진 쓰레기 같고 더러운 벌레보다도 못한 목숨을 뻔뻔스레 이어 온 제게! 키보가미네에 입학한다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일지 아마 상상도 못 하시겠죠. 이 학원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 순간부터 이곳은 이미 제 우상 그 자체였어요. 졸업생들의 재능 리스트도, 여기서 발표된 눈부신 연구 성과들도 모두 이 자리에서 외어 보일 수도 있어요. 제가 그 일원이 된다는 가능성 같은 건, 제아무리 전두측두엽 치매와 림프종 3기의 병발의 대가로라도 감히 생각조차 못 해 본 것이었다고요!”
“그, 그렇게까지. 그런가. 기특하군. 본교는 언제나 애교심 많은 신입생을 환영한다네.”
“―설령, 그런 꿈도 꾸지 못할 영광을 제발로 걷어차는 짓이더라도. 저는 경애하는 키보가미네에 거짓을 고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제 고백을 듣고 깨달으셨을 것처럼―”
마치 열과 환상과 그보다 짙은 무언가에 들뜬 것 같이 기묘한 어조로 쏟아내던 농밀한 음성은, 뒤로 갈수록 피시식 바람이 새어나가듯 서서히 낮아져, 종래는 속삭이듯이 줄어들었다.
“초고교급 행운 같은 게 아니에요. 착오가……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불안정한 모양으로 뻗친 머리칼이 맥없이 흔들렸다.
“키보가미네에서는,”
그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꾸준히, 매년 한 명씩 초고교급의 행운을 선발해 왔지. 방식은 자네도 잘 알다시피, 전국의 평범한 현역 고등학생들 중 추첨으로 한 명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조용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선고를 기다리듯이.
“다른 재능들과는 달리, 행운이란 개념부터가 지독히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었고, 학원의 역사 내내 그것을 재능으로 인정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아 왔다. 유감스럽게도, ‘행운’의 이름 아래 선발된 학생들은 그 의문을 없애주기는커녕 오히려 반대파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곤 하였지. “아무리 지켜보아도 모두 범재일 뿐이지 않느냐, 운 따위는 역시 재능이라고 할 수 없다, 키보가미네에 어울리지 않는다―” 라고. 특히 최근에는 여론이 악화 일로여서, 실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행운을 선발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올해의 초고교급 행운은 키보가미네 사상 최후의 초고교급 행운이 되는 것이지.”
“그런……가요.”
무릎에 놓이었던 손가락들에 하얗게 핏줄이 서는 걸 지켜보며, 한가로이 속삭였다.
“그것도 자네가 선발되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말이야. 코마에다 나기토 군.”
“……네?”
“자네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어. 자네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이곳까지 온 것이었지. 그럼으로써 입학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걸 각오하고. 그것도 그렇게 키보가미네를 동경하였다고 하면서. 솔직히, 자네의 용감함과 정직함에 감탄했어. 그러나 그에 경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나도 털어놓자면, 키보가미네에서 입학통지를 하기 전에 선발자에 관해서 사전에 면밀히 조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상당한 착각이야. 자네가 나에게 직접 전해 준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이미 자네의 약력에서 확인이 끝난 내용들이다.”
나른하게 중얼거리자, 상대의 고개가 홱 들렸다. 소용돌이치던 청회색 눈동자를 커다랗게 치켜뜬 채, 코마에다 나기토는 새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쳐다보아 왔다.
“그, 그 말씀은.”
“알겠나. 자네는, 아니, 자네의 ‘행운’은―”
몸을 숙여, 그 파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키리기리 진은 낮지만 강하게 외쳤다.
“대단히 훌륭해!!!”
벌컥. 여태까지의 쌀쌀맞고 절제되었던 태도가 거짓말처럼, 그는 소년의 무릎을 헤매던 새하얀 두 손을 들어 올려 세게 움켜쥐었다. 양 손목을 붙잡힌 소년도, 그걸 붙잡은 장년도 서로 손 따위는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파래진 얼굴과 붉어진 얼굴이 한참 서로를 마주 바라본다. 국가의 정점 그 배후라고도 일컬어지는 기관의 수장인 자가 숨길 생각조차 없이 뿜어내는 열의에 이끌리듯, 파랗게 질렸던 얼굴에도 점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학원장님, 제 행운이…… 훌륭하다고요?”
불안하게 내밀어진 목소리에, 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네 같은 행운의 소유자는 키보가미네의 화려한 역사 속에서도 결코 찾아볼 수 없어. 물론 일본 전역의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추첨프로그램에서 키보가미네의 행운으로 선발된 사실만으로도 초고교급의 행운이라는 명목에 차고도 넘치지. 3억 엔의 복권 당첨만으로도 일반인은 평생에 한 번도 겪을 수 없는 행운일 거야. 그러나 그 복권이 우연히 납치당해 갇혀있던 쓰레기봉투 속에서 발견한 것일 확률은 천문학적인 수준까지 올라가지. 아, 그렇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공중 하이잭 중에서 운석이 떨어져서 범인만을 강타한 이야기였지. 실존하는 증거를 통해 수집한 약력임을 알면서도 처음 그걸 보고서는 차마 그대로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네. 그걸 모두 한 명의 인간이 겪어낸다? 코마에다 군, 오, 코마에다 군.”
코마에다가 아까 광신처럼 쏟아낸 키보가미네에 대한 찬미에 뒤지지 않을 기세와 어조로, 키리기리 진은 마치 도취된 듯이,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여태껏 참을성 있게 눌러두고 있던 흥분을 쏟아내고 있었다.
“자네의 행운은 진짜배기야. 키보가미네는 최초로, 진정 ‘초고교급의 행운’을 맞이하게 된 거라고! 행운 연구도 진전될 거야. 그 미지의 영역까지도 우리의 것이 된다면, 그때야말로―”
연연히 말을 이어가던 키리기리 진은 별안간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코마에다는 미처 그것에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다른 것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파란색에서 다시 빨간색으로, 빨간색에서 다시 보라색으로, 요동치는 얼굴에 박힌 두 눈을 빙글빙글 하염없이 돌리며 그는 입을 열었다.
“학원장님, 그렇지만, 아시잖아요. 제 운에는 반동이 있어요. 제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반동이― ‘희생’이 있는걸요!”
오랫동안, 그야말로 살아오는 동안 끊임없이 억눌러 온 외침이 터져 나왔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키보가미네에 제 발로 출두하여 입학을 사양하려고 결심한 이유였던 까닭이다.
부모님을 죽게 하고, 하이잭 사건과 살인 사건을 일으키고, 끊임없이 주변을 할퀴어 대며 그의 운은 발동한다. 냉담한 태도와 적절한 광기의 표출로 주변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한 끝에는 그 자신에까지 어김없이 비정한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끊임없이 부정하고 자위하여 왔다. 그래도 그 대가로 막대한 돈이 생겼으니 행운이 아니었느냐고 억지로 외쳤다. 제 운에 휘말린 이들은 그저 그토록 약하고 무가치하였을 따름이라고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러나 사실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토록 더럽고 추악하고―
“희생?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코마에다 군.”
차라리 흉포하게, 끝도 없이 소용돌이치던 상념이 끊어졌다. 멍하게 들어 올린 시선의 끝에는 마치 그 자신의 표정이 그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리둥절한 표정이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한심한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의 인내심까지 엿보이는 표정으로 키보가미네의 학원장이 말을 이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아니, 물론 불운과 행운이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속하여 일어난다는 그 자체도 흥미로운 메커니즘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요?”
“물론. 오로지 중요한 건 재능이다. 설령 그에 휩쓸리는 것들이 있다 한들, 어떻게 그런 걸 하나하나 신경 쓰겠나? 그런 건 재능의 주인이 하여야 할 일이 아니야.”
“오로지 중요한 건, 재능…….”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코마에다에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어지는 목소리는 감미로운 음악처럼 미끄러지듯 흘러들어 왔다.
“그렇지. 그리고 자네는 그야말로 빛나는 행운의 소유자로서, 키보가미네에 걸맞은 재능의 주인이고.”
“……아…… 으으…….”
코마에다의 입가에서 신음이 새었다. 크게 뜨인 눈가에는 아무것도 맺히지 않았지만, 학원장의 음성만은 마치 참혹하게 말라붙어 있던 샘 바닥으로 떨어지는 찬 빗방울처럼 거세게 내리꽂혀 와 버석한 마음자락을 적신다. 갈라진 채 피를 흘려대던 표면을 투명하고 단단한 얼음으로 빈틈없이 덮어 매끄럽고도 반짝이게,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도록 훌륭하게 다듬어 갔다.
“부디 초고교급 행운으로 입학하여 주게. 코마에다 나기토 군.”
순수한 열의와 성의를 담아 그렇게 말하는 학원장의 눈은 기이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네. 기꺼이.”
라고, 지금 바로 이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원받은 듯 충만한 기쁨으로 찬 채 다짐한 소년의 눈도, 불안과 자책의 그늘에서 풀려나 가며 점점 그와 비슷한 광채를 띠어 갔다.
빛나고, 견고하고, 똑같은 형상으로 비틀린, 키보가미네의 눈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