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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쿠라 이즈루X키리기리 쿄코] 

Faded 

Photo

바랜

사진

​W. 물안개 

 곱고 가는 선율이 회장을 적셨다. 

현을 켜든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셔터 소리도 끝나지 않았다.

소녀의 춤 또한.

그리고 숨도.

 

 키리기리 가문의 긍지를 걸고.  고운 자태를 빛내며 춤을 추던 소녀는, 기자의 질문에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선명하게 빛나는 조명을 받으며 고혹적인 모습을 뽑내었을 뿐, 한 시간 가량 계속되는 인터뷰에도 두렵다는 기색은 없었다. 처음 인터뷰를 마주한 사람답지 않게 초연하고, 담담하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기자도 한동안 말을 잃을 정도였다. 

 조명이 내리쬐는 빛이 눈부신 듯 살짝 눈을 내리감은 모습도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마치 비단처럼 내려뜨린 머리칼이 허리를 넘어서 사뿐히 기모노 위로 흐르는 형국이다. 

 찰칵.

 셔터 소리가 연신 사방을 울렸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빛 속에서 사진사는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는 지루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주위를 살피다, 이제 막 자리를 나서는 무용가의 자취를 눈길로 쫓았다. 여느 사진사와 다르게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채였다. 훤칠하게 키가 크고, 위엄있는 눈을 가진,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사진사라고 섣불리 지칭할 수 없는 그가 분명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사진기가 배제 된 그의 모습에서 더 이상 사진사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조용히 걸어가 모니터 속으로 엇비치는 자잘한 사진들을 정리했다. 그 사진들은 하나같이 한 사람을 담고 있었다. 키리기리 쿄코.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자, 초고교급의 무용수로 일컬어지는 여자다. 촬영 스탭들과 방송을 진행하는 MC들은 흥분에 젖어 마침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며 떠들어 댔으나 남자는 일말의 흥미도 보이지 않았고, 그녀를 실제로 마주 했을때도 카메라만 부여잡고 있었다. 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말던 제게는 관계 없는, 시시한 일입니다. 차가운 대꾸에 동료들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카무쿠라답다며, 슬슬 화제가 키리기리에게 넘어갈 무렵이었다. 누군가 내어 뱉는 소리가 카무쿠라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런데 말야, 키리기리 쿄코. 그 여자도 다를 바는 없던데. 누군가 그런 말을 꺼내자 모두가 적극 찬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같이 시시한 담화, 그 속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전부 차가운 철가면을 쓴 듯한 키리기리의 태도를 담고 있었다. 명민한 청각을 가진 남자에게 고스란히 들려온 내용이었으나, 그는 이내 그 소리를 등지고 말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찍은 사진에게 쏠려 있을 뿐이었다. 이야깃거리의 주인공인 키리기리 쿄코의 사진에게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질문을 던지던 인터뷰어와 다른 촬영 스탭들은 자리를 떠나고 이미 없었다. 식사를 들자는 권유에 남자는 정중하지만 어딘지 싸늘한 태도로 거절을 남겼기에, 촬영 스튜디오에는 오늘의 게스트인 키리기리와 의문의 사진사밖에 남질 않았다. 서로 경계심은 보이지 않았지만, 스튜디오 내에는 어색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사진사의 일은 그저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 하는 것 뿐. 그의 의무는 단지 그것밖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다른 필요성은 느끼지 못 했다. 

 그러나 무용수는 달리 생각 하는 모양이었다. 

 "카무쿠라 이즈루. 당신이 초고교급의 사진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다가온 소녀의 일목요연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과연 듣던대로 차가운 태도였다. 인터뷰 속에서의 그녀는 그저 담담했으나, 현재로서는 정말 가면을 쓴 것처럼 굳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거울을 보는 것처럼 익숙하다. 불쾌한 익숙함에 숨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내린다. 과연. 철가면이라 했던가, 시시하군. 불현듯 스친 생각이었다. 언젠가부터 입버릇처럼 되풀이 하던, 시시하다는 편린들. 이제 그 말에 의미를 담고 있기나 한 것인가, 헤아리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자신과 닮은 어투, 목소리, 분위기. 단정하게 차려입은 기모노 속에서 풍겨오는 고압적인 감각. 그러나 묘하게 다른 면이 있다. 관찰력과 분석력이 뛰어난 카무쿠라로서는 대번에 판단이 가능했다. 

 "그렇습니다만, 제게 어떤 용건이 있으신 겁니까."

 흐르는 어조가 고약할 정도로 냉기가 서려 있다.

 "…아무것도. 식사는 들지 않는 건가요?"

 "아직 식욕이 왕성해질 시기는 이르거니와, 오전의 허기를 충족시킬 영양소는 이미 채운 상태입니다. 더이상의 불필요한 영양 보충은 하지 않습니다."

 "…."

 "그쪽이야말로 식사를 거를 생각입니까, 어리석군요."

 "체중 관리는 무용수에게 있어서 필수적이니까."

 "굶는 것은 되레 체중을 관리하는 것에 있어서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만."

 "상관없어…, 없습니다."

 먼저 말을 건 주제에 돌아오는 대답은 짧았다. 존댓말이 익숙하지 않은 듯 반말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부잣집의 영애임을 짐작했다. 그러나 카무쿠라는 더 말을 거는 대신 촬영 스테이지의 정가운데로 걸어갔다. 그 곳에는 키리기리가 인터뷰에 응하면서 앉았던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상대가 기꺼이 응낙할 것임을 알면서도 의례적으로 건네는 말. 그리고 뒤따라오는 고개의 끄덕임, 짤막한 찰나 속에서 카무쿠라는 스튜디오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인터뷰어가 앉았던 자리에는 어느새 키리기리가 앉았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검고 붉은 기모노를 착용한 여인과, 반쯤 흐트러진 장발의 흑청년.  

 문득 사진을 찍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찍으면 그대로 재현되는 현실의 흐름에, 그는 묘연한 희열을 느꼈다. 그의 앞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지치고 차가운 표정으로 조각처럼 앉아 있다. 예술적인 충동일까. 우스운 일이다. 모든 것에 지루함을 느끼는 그가, 어차피 말로가 빤히 보이는 예술을 부러 자처하고 있었다. 몇장쯤은 괜찮을 것이다. 마침 사진을 내려놓은 테이블이 곁에 있었다. 그의 길쭉한 팔이 닿을만한 거리였다. 곧게 뻗어 카메라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이윽고 허공 속에서 키리기리의 모습을 담았다. 셔터가 두어번 깜박이고, 키리기리는 턱을 들어 카무쿠라를 응시했다. 

 "실례입니까?"

 "딱히…,"

 "계속 해도 되겠습니까."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렌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않은 듯, 옷매무새나 머리카락을 매만지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 편이 카무쿠라로서는 좋았다. 한 폭의 자연광 속에서 날아드는 인공 조명은 필요없다. 빛과 색감을 조정하며 대상의 아름다움에 기여하는 것은 온전히 사진사의 몫이였고, 카무쿠라는 그것을 완벽히 그것을 수행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그의 손으로 들어갈 사진은 정교한 편집을 거쳐 최종적인 단계는 건널 것이다. 

 곧고 가늘게 뻗은 몸매를 구석 구석 훑는 카무쿠라의 시선이 렌즈 너머로 흘러내렸다. 키리기리는 완벽한 모델로서 손색이 없었다. 독특한 기모노의 곡선이 함빡 시야 속을 차지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카무쿠라의 눈길은, 색정 따위의 감정을 담은 농후한 시선이 아니라, 그저 예술을 탐닉하는 집요한 눈길이었다. 긴 적막을 깨는 셔터 소리만이 찰칵, 하고 둘의 장벽을 허물어냈다. 조명을 받으니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를 곁눈질하며 느릿하게 촬영하던 카무쿠라가 잠시 시선을 거두고 카메라를 어루만졌다. 

 카무쿠라가 두 손을 다시 들어올린다. 그와 동시에 키리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시간이 지나 느슨해져 있던 기모노의 자락이 어깨춤을 지나 흘러내리고 있었다. 찰칵. 다시 한번 셔터음이 터져나와 스튜디오를 감쌌다. 카무쿠라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오비가, 풀리기 직전이라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카무쿠라가 다른 사진을 한장 더 찍은 시기가 하필 일치한 것. 기묘하지만 의도되지 않은 단순한 우연일 뿐이었다. 그러나 카무쿠라는 변명없이 자신이 범한 결례에 대한 예의를 깍듯이 차렸다. 

 "실례 했습니다. 방금 그것은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됐어요."

 키리기리는 자리에 그대로 다시 앉아버렸다. 벌어진 옷깃을 여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가슴을 반쯤 드러내보였다. 흘러내린 기모노 자락은 간신히 팔꿈치께에 걸터앉은 채였다. 카무쿠라는 굳이 의문을 표시하진 않았으나, 사진기를 들여다보던 시선을 들었다. DELETE를 향하던 손길이 자연스레 비끄러졌다. 


 "사진사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사물을 담아내는 일이라고 들었어요. 중단 할 이유는 없을텐데."

 유창하게 존댓말을 쏟아내다가도 금세 말이 짧아진다. 카무쿠라는 그녀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 알았으나, 흔들림 없이 단호히 키리기리의 말을 자르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제게 그런 천박한 취미는 없습니다."

 사진기의 화면 속에서는 초점이 비껴나간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지우려던 사진. 그 속에는 풀러내리는 오비, 선명하게 드러난 쇄골의 깊숙한 음영과, 당황이 언듯 설비친 키리기리의 표정이 촘촘히 박혀있다. 

 철가면의 여인에게서도 저런 표정을 볼 수 있다니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오래 잠들지 못할 장면이였고, 이런 것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사진으로 포착해야 할 터. 원체 사진을 많이 찍는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 더욱 귀한 물건처럼 여겨졌다. 키리기리도 그것을 알고 그런 말을 한 것이리라. 그러나 흥미없다. 물결처럼 짤막하게나마 일었던 감정을 한 마디로 정리한 채, 그는 삭제를 지그시 눌러 내렸다. 

 "잠깐 기다려. 아니, 기다려줘요."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귓전에 꽂혔다. 그러나 이미 사진기는 삭제를 알리는 활자를 몇자 내보내고 있었다. 그것을 무를 생각도 없다는 듯, 가만히 사진기를 한번 쓸어내린 카무쿠라는 키리기리를 시선 속으로 담아냈다. 

 무거워 보이는 옷을 끌어올려 가슴을 덮었으나 다시 사르륵, 흐른다. 아직 여미지 못한 오비 탓이리라. 기모노는 혼자 착용을 마무리 하기 어려운 물건이다. 특히 무용수를 위한 고급스러운 물건이라면, 그 무게가 더할 터다. 그런 것쯤이야 순식간에 계산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선듯 그녀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여성의 몸에 이질적인 남성의 촉감을 더한다는 것은 상당히 곤란한 일이다. 지금 상황에서 더 당혹스러운 일이 있겠냐마는, 카무쿠라의 판단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잘못한 일은 없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키리기리가 자신에게 책임을 물으려 든다면 반박 할 여지는 충분했다. 물론 그럴 여자로 보이지도 않았으나, 예의 발언은 카무쿠라를 경계토록 만들었다. 

 "이제…, 돌아갈 건가요?"

 반쯤 풀어헤쳐진 옷이 흰 손에 붙들린 채로 물어오는 형편이 꼴사나웠다. 어딘지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형국이 눈쌀을 찌푸리게 만든다. 시시하다…, 는 말버릇으로 단번에 정의될까. 사진 모델로서의 이채로움은 인정할만 했으나, 역시 사람으로서의 시시함은 어딜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목구멍 속으로 사무치는 말을 끝내 삼키며 카무쿠라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다른 스태프들이 돌아오기 전에 매무새를 갖추시는 편이 나을겁니다."

 대답도 없이 한달음에 이야기 한 후, 소지중인 장비들을 챙겼다. 

 "다음 공연, 보러와줘,"

 "요."

 "굳이 불편하시다면 존칭은 사용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녀가 어색하게나마 붙이는 존대가 오히려 어색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인연도 아닌건만. 사진과 관련 된 용건이 아니라면, 단호하게 쳐내는 편이 시간 절약 측면에서도 나았다. 카무쿠라는 그대로 고개를 돌린 채, 자리를 비우려 발걸음을 옮겼다. 불러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안 것일까, 이번에는 아무런 말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정말, 끝.

* * *

 

 

 

 

 

 

 

 

 "카무쿠라 씨."

 "무슨 용무입니까?"

 감정없이 단조로운 목소리가 흐른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던 사내는 흘긋 곁눈질하며 물어왔다. 그 내용인즉슨, 도쿄 어디선가 열리는 유명한 댄서의 사진을 찍어주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그동안 높은 인지도와 탄탄한 팬덤을 다진 카무쿠라로서는 이런 제의를 받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이 되었다. 곧 카무쿠라만을 위한 전시회도 마련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들어오는 요청마다 족족 응낙할 정도로 생각이 얄팍한 위인은 아니었기에, 생각 해보겠노라 대답한 카무쿠라는 이내 입을 다물고선 낡은 사진기의 파일을 옮겨담는 것에 몰두했다. 유명한 댄서라는 이야기도, 딱히 그의 흥미를 자극하진 않았다. 사진에 있어서는 말이다, 그는 수 년 동안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 사람을 신뢰할 수 없었다. 무대 매너가 반드시 좋은 사진으로 귀결될 수는 없는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을 동질의 것으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였으니. 

 막무가내로 쥐여진 티켓에는 댄서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시선을 들어 그것을 보니, 어딘지 익숙한 활자가 눈에 밟혔다. 파일들을 정리하던 카무쿠라의 손가락이 잠시 멈추었다. 보통 글씨의 색으로는 흔히 쓰이지 않는 보라색이었다.

 키리기리 쿄코, 일본 무용수

 동시에 컴퓨터의 화면에서는 익숙한 정경이 펼쳐졌다. 기모노. 반쯤 헐벗은 여인. 이질적인 형용사였다.

 

 

 

 

 

 

 

 

 

 

 

* * *

 

 

 

 

 

 

 

 

 회장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북적였다. 인파가 한가득이었다. 이곳에 발길을 들인 그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아기를 안고온 엄마, 아이들이 무려 7명에 달하는 대가족, 홀로 즐기듯 선 사람들(사실은 외로운 독신일게 분명하리라), VIP 석에서 동료를 동반하고 와 조용히 사담을 나누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신사숙녀들, 촬영 스태프들 등. 카무쿠라가 자신을 사진사라고 밝히니 금세 VIP석으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시야가 확 트인 관중석은 텅 빈 무대도 똑똑히 보이게 해주었다. 

 사진을 찍기에 썩 전망이 좋다고 할 순 없었다. 탁 트인 시야 속으로 자리잡힌 무대는 마모된 색채를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고, 위치는 꽤 떨어져 있었다. 그마저도 조명의 색은 너무 탁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용수의 명성과는 달리 별로 좋은 조건은 아니리라. 잠시 시간이 지나니 곧 무대가 시작된다는 전조가, 걷혀진 막을 통해 알려졌다. 희미한 조명만이 드리워 무대를 비췄고, 그 속으로는 여러명의 무용수가 발을 디딘다. 높은 음색의 노래가 흘러나와 무용수들의 발재간에 흐름을 맞추었다. 무표정하게 그들의 사진을 찍던 카무쿠라는 문득 지루함을 느꼈다. 무대의 주인공은 어디 있는 것인가. 뇌리 속의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거뭇한 형체가 무대를 장악했다. 

 곡조가 최절정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소녀의 춤은 강렬했다. 아니, 2여년이 지났으니 더 이상 소녀는 아닐지도 모른다. 연약한 곡선이 힘 찬 형체로 뻗어나가 마침내 한 무리를 이루어낸다. 검푸른 빛의 기모노는 쏟아지는 조명을 받아 보랏빛으로 넘치듯 번들거렸고, 허공 속으로 뻗은 팔이 희었다. 사진 속으로 찍힌 그녀는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필시 비극의 주인공일 터였다. 자세히 알아보지 않아 카무쿠라는 이야기의 흐름을 대강 짐작해야만 했다.

 단정히 틀어올린 머리카락과 검게 물든 기모노가 제법 조화되고 있었다. 본디 허리춤까지 닿던 은발의 머리칼이 고아한 자태를 뿜으며 머리에 얹혀있다. 허리를 굽히고, 다시 들어올린 고개에선 표정의 변화가 시시각각 인다. 철가면의 여인. 그 별명의 소유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정교한 표정을 흉내내며 그녀는 다시 허리를 피었다. 어려운 동작을 군더더기 없이 모두 끝낸 그녀는 마침내 무대에서 물러섰다. 그녀의 표정은 다시금 단아한 철가면으로 돌아와 있었다. 낮아진 노래 소리가 무대가 끝났음을 알렸다. 찰칵. 덩달아 낮아진 셔터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가볍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키리기리의 손 동작에 관중들은 박수갈채를 쏟아내었다. 카무쿠라로서는 무용의 훌륭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집요한 눈길은 카메라의 화면을 훑었다. 역시 훌륭한 사진 모델이 맞다. 그것을 새삼 되짚으며 그는 VIP 석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슬쩍 회장에서 빠져나올 채비를 다한 것이다. 다음 공연 때문인지 새로이 막이 올라 다음 곡조를 위한 준비가 이어지고 있었다. 

 카무쿠라의 다른 손에는 빛이 바랜 사진이 쥐어져 있었다. 반쯤 기모노가 흘러내린 순간의 그 사진이다. 삭제되지 않은 데이터는 컴퓨터 속의 파일로서 자리잡았고, 그것은 그 자체로서 카무쿠라의 마음에 미련을 두었더랬다. 그는 가만히 곱씹었다. 미련. 두고 온 미련을 해소한 사내는 회장을 뒤로 했고, 빛 바랜 사진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소녀의 춤은 숨을 멎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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